
산상수훈은 양심을 열어야 들리는 말씀
【갈릴리 예수산책】 산상수훈
산상수훈은 양심을 열어야 들리는 말씀
산상수훈이 심오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 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주목한 것이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다. 마음에 초점을 두고 마음속으로 파고드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이야기했다면 우리에게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드러내심으로써 모든 문제의 근원이 마음에 있음을 선언하시니 우리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마음이기 때문이다. 알다가도 모르는 게 인간의 마음이요, 내 안에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원숭이가 이 나무 저 나무를 이리저리 날뛰듯이 사람의 마음이란 정함이 없고, 하루에서 수십 번 바뀌는 게 우리 마음의 세계다. 사람의 마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영역이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 곳이 마음의 세계다. 순간적으로 그토록 거룩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도 순식간에 악마의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추악하고 더러웠던 마음이 어느새 순수하고 선한 마음으로 뒤바뀌는 나 자신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선한 행동 이면에 숨어 있는 야수같은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바로 인간 내면의 본질을 간파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살인 사건이 나면 살인한 결과 자체만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살인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간음한 사실 자체만을 놓고 비난하고 정죄하지만, 예수님은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잠시 잠깐이라도 여자를 보고 불충한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이미 그 여자를 간음했다고 선언하신다. 짧은 순간의 분노, 짧은 순간의 욕설, 짧은 순간의 음욕이 곧 살인이요, 간음이요, 죄악으로 보신 것이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마음의 영역이 있다. 사심, 공심, 양심이다.
첫째, 사심(私心)이란 이기심이요 ‘에고(ego)’ 라고도 한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마음이다. 여기에는 욕망이 주인이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
둘째, 공심(公心)이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남의 눈치를 보는 마음이다. 최소한의 윤리적 마음이다. 이타심이라고도 한다. 상식과 도덕이 이곳의 주인이다.
끝으로, 양심(良心)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자리다. 성령이 거하는 자리이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마음이다. 이곳의 주인은 정직이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은 양심밖에 없다. ‘사심’으로 산상수훈을 읽으면 곧바로 찢어버릴 것이고, ‘공심’으로 산상수훈을 보면 윤리적인 말씀만 오려서 벽에 붙여 놓을 것이다. 산상수훈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말씀이 되려면, ‘양심’을 열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어떤 마음의 밭을 준비하느냐가 관건이다. 은혜의 말씀이 되느냐, 율법이 되느냐, 아니면 휴지 조각이 되느냐는 산상수훈을 받는 마음에 달렸다. 양심을 열어야 산상수훈은 은혜와 진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