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는 것이 곧 욕망이요, 그 욕망이란 소유욕이다
【갈릴리 예수산책】 예수의 간음론
보는 것이 곧 욕망이요, 그 욕망이란 소유욕이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살인과 더불어 간음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 자체가 예수님은 간음이라고 이야기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욥기에서 나온 것이다. 욥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욥기 31:1~3).”
만일 내 눈이 처녀를 주목하여 마음에 범죄하였다면 하나님께 무슨 상급이 있겠느냐는 것인데, 예수님은 지금 욥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마음을 통제할 수 없게 한 것은 눈이다. 눈이 마음을 통제하기 때문에 마음이 눈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 다른 곳에 보면, 예수님은 그 눈을 뽑으라고까지 하신다. 그 다음에 손이 따라가는 것을 통제를 못해서 마음이 손을 따르면, 그때에는 손을 자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아마도 우리는 눈을 뽑아도 몇 번을 뽑았고, 손을 잘라도 몇 번을 잘랐을 것이다.
아름다운 장미꽃을 보면 우리의 이성과 감정은 아름답다고 감탄하며 한참을 들여다 본다. 그러면 된다. 그런데 그 순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소유욕이라는 욕망이 일어난다. 꽃을 가지고 싶다. 꺾고 싶다. 그때 이성은 욕망을 말리며 책망한다. 얼른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데 욕망은 발길을 멈추고 계속 보길 원한다. 눈이 욕망을 계속 자극하고, 결국 이성은 욕망에 밀려 꽃을 꺾고야 만다. 음욕이란 그런 식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수치스러운 행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항상 수치스러운 상상이 있었다고 보셨다. 그 상상은 마음에 있는 것이고, 그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눈에서 오는 것이니, 눈을 자제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눈을 뽑으라고까지 과격하게 말씀하신다. 눈이 통제가 안 되면 아예 보지 말고, 손이 통제가 안 되니까 손을 자르라고 하신다. 그래서 오리겐 같은 고대의 교부 신학자는 아예 거세를 해버렸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정말 잘라버렸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오늘날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들이 머리에 쓰는 히잡과 온몸과 얼굴을 검은 천으로 두르는 차도르나 부르카는 어디서 온 것일까? 왜 여성들에게 얼굴을 가리라고 했을까? 남성들의 음욕을 막기 위한 것인데, 극단적인 남성 중심의 폭력적 문화다. 아주 못되고 유치한 이슬람 남성들이 만든 전통이다. 음욕이 일어나지 않도록 남성 자신이 절제하고 조절해야지 여성이 무슨 죄인가? 극단적이기는 오리겐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는 양심적이다. 음욕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눈을 뽑고 손을 자르라는 예수님 말씀은 문자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불구자가 되어서 할 수 없게 된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특별히 간음에 대한 말씀은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 볼 게 너무 많기 때문에 어떤 신학자는 “문화적 불구자”가 되라고 말한다. 이것 저것 많이 보아야 세상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오늘의 문화에서 세상의 모든 것에 촉각을 세우지 말고 아예 문화적으로 장애인이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계속 보는 이상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마음은 결국 몸을 추동하여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만든다. 눈으로 보는 이상 이성은 욕망을 결코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