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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아버지 혁명

【갈릴리 예수산책】 예수와 아버지

 

예수님의 아버지 혁명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과연 그 시대 신관의 일대 혁명이었는가? 지난 주글에서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구약성서에서도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는 않았어도 비유적으로는 표현한 일들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아버지 호칭이 결코 새로울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자 요아킴 예레미야스의 ”아바는 아빠다“ 라는 신학 또한 원어 연구의 부실에 의한 해프닝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마치 기존에 없던 아버지 호칭을 처음 사용하신 것도 아니고, 아버지만으로는 그 의미가 약해서 부족해서 어린아이가 부르는 아빠라고 자극적으로 부르신 것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결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복음서의 예수님의 언행을 잘 살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일단 양적으로 볼 때, 신약성서, 특히 4개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부르신 ’아버지 하나님‘은 구약 전체와 사복음서의 엄청난 분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매우 많은 횟수를 보여준다. 마가복음이 6회, 마태복음이 47회, 누가복음이 21회, 요한복음은 무려 100회가 넘는 빈도수를 보여준다. 네 권의 책에서 150회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질적으로 보아도 예수님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고,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심지어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아버지로 풀어내 보이시기까지 하셨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신관은 아버지 신관이요, 그의 신학은 아버지 신학이며, 그의 신앙은 아버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예수님의 여러 가르침들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다. 이것을 혁명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구약에는 없던 이름을 예수님이 창조해 내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신 최초의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자고로 혁명이란 없던 일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혁명이란 오랜 세월 동안 있어왔고 보아왔고 쌓여왔던 엄청난 에너지가 결정적인 때를 만나 폭발하는 사건이다. 마치 솟아오른 용암이 산과 마을을 덮어버리듯, 한 시대를 뒤집어 놓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대전환의 카이로스(시간)다. 즉 양과 질에서 기존의 시대와 압도적 차이를 보이는 현상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아버지 호칭은 혁명적이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 호칭 사용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으셨다. 놀랄 정도로 아버지가 입에 붙으신 분이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너의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 ”너희 하늘 아버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자기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원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등등. 이처럼 예수님에게 아버지 칭호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입에 달고 사신 분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무 어려움 없이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매순간 아버지를 입에 달고 사셨던 어떤 한 분의 열정 덕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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