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의 집착에서 해방한다는 것
갈릴리 예수산책 – 예수와 재물편 4
돈의 집착에서 해방한다는 것
예수님은 예배 때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인데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빠져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기부금이든 십일조든 하나님의 정신이 들어가야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빠진 채 드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에서 알 수 있듯이, 천 원을 내는 그녀가 드린 돈이 백 만원을 드린 사람보다 많은 이유는 전부이냐 일부이냐의 문제다. 전부와 일부의 차이는 액수의 차이가 아니라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는 마음의 차이다. 전부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고, 일부는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기부금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돈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뭐라 말씀하셨을까?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시면서 돈의 핵심적인 속성을 드러내신다. 돈 버는 맛이 세 가지 있다는 것이다. 첫째, 모으는 맛이 있다. 돈이 모아지면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래서 둘째, 늘리는 맛이다. 자고 일어나면 늘어나는 돈을 보는 기쁨은 엄청나다. 셋째, 누리는 맛이다. 늘어난 돈 위에 자신의 영혼을 눕히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
어리석은 부자는 돈을 모았고, 확장했고 창고를 증축하며 내 영혼을 여기에 쉬게 하리라, 누리리라 하면서 돈을 누리는 맛을 보길 원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종말은 세 번째 누리는 맛에서 임한다. 물질의 세계에 영혼을 눕히는 순간 하나님의 심판이 찾아온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란 바로 자기가 번 돈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는 사람이다. 돈에 자기의 영혼을 눕히고 자기를 위해 쌓아둘 줄은 알아도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하나님을 위해 돈을 쌓아둘 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바보다.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일갈하신다. 자기 자신에게는 부유(wealthy)하지만, 하나님과 타인에게는 부요(rich)하지 못한 자의 끝이 그렇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사람은 과연 돈을 어떻게 써야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단초를 주고 계신다. 돈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 함이 돈 숭배와 집착을 벗어나는 첫 출발이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만난 자리에서도 역시 돈 이야기를 하신다. 영생이라는 나름 진지한 질문을 던지며 찾아온 청년에게 온전해지고 싶으면 너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하셨다. 추상적인 계명 지키기에 만족했던 청년은 자신이 가장 집착하고 숭배하는 것이 돈인 줄 몰랐다. 예수님은 그의 허를 찌르셨다. 자신의 돈을 누군가에게 거저 준다는 것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그는 번민하며 돌아갔다.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보다 부자가 자신의 돈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신다. 인간이 돈으로부터 해방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19장으로 가면 돈에서 해방한 사람이 나온다. 부자청년과 달리 삭개오는 평생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산 사람이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잘난 척하며 접근한 것과는 달리 삭개오는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가난한 마음이었다. 부자청년이 자신을 영생에 가까운 사람처럼 여긴 것에 반해, 삭개오는 자신을 영생과 거리가 먼 자로 여겼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진지하지 못했고 삭개오는 지극히 진지했다.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몰래 보다가 예수님께 들켰고, 예수님이 그를 불렀고, 그는 따랐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예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돈에 대한 양심선언을 한다.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이며, 만일 세리로 살면서 남에게 부당하게 세금을 걷은 것이 있다면 4배로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다. 돈의 숭배와 집착에서 해방되는 순간이다. 바로 이 순간을 예수님은 놓치지 않고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신다. 돈의 세력에서 분리되는 순간이 곧 구원의 순간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진정한 회개는 지갑의 회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