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금논쟁 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갈릴리예수산책-논쟁편
세금논쟁 2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취할 수 있는 대답은 세 가지다. 첫째, 세금을 내라. 그리고 매국노가 되자. 둘째, 세금 내지 마라. 그리고 죽자. 셋째, 대답 안 할란다. 침묵하자. 그러나 지금 세금 질문에는 침묵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침묵하고 돌아서기에는 비겁하고 무책임하게 보인다. 예수님은 여기서 제4의 대답을 시도하신다. 이른바 질문의 틀(프레임)을 깨뜨리고 전혀 다른 틀을 내놓으신다. 이른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눅 20:25).“는 유명한 말씀이다.
논쟁을 분석해 보자. 질문자들은 세금을 내야할 대상을 가이사 라는 한 명으로 정해놓고, 내는 행위를 놓고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질문의 판을 뒤집어 버렸다. 세금을 내는 대상을 하나님과 가이사 둘로 만들고, 행위를 하나로 줄여버렸다. 가이사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세금을 내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다 옳다. 질문자들은 식민지 상황에서 애국과 매국의 딜렘마를 활용하여 올무를 놓았다. 제국의 지배에 따를 것인가, 조국의 명예를 지킬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와 이스라엘의 대립 구도를 깨버리셨다. 오히려 이스라엘 자리에 하나님 나라를 집어넣으셨다. 그리고 로마와 하나님 나라를 대립시키지 않고, 오히려 병렬시켜 버렸다. 그리고 두 나라의 임금 모두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세 가지 모두를 긍정하셨다. 이스라엘의 현실을 지배하는 로마제국의 실체를 긍정하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영적으로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도 부정하지 않았으며, 세금 내는 행위 자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셨다. 누구도 예수님의 논리에 반박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눅 20:26).“ 그들의 반응은 딱 세 가지로 표현한다. 책잡지 못했다. 놀랐다. 침묵했다. 민족주의자는 할 말이 없고, 매국노는 다행이라 여긴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머리를 끄덕였고, 종교지도자들은 고맙기까지 하다.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대답이다.
이 말씀은 이후 기독교신학에 위대한 영향을 준다. 특히 국가와 교회가 어떤 관계여야 하나를 놓고 다툴 때 표준이 되는 말씀이 되었다. 국가는 국가의 일을 하고, 교회는 교회의 일을 하라. 정치는 정치인이, 종교는 종교인이 알아서 하자. 이른바 정교분리 신학이 여기서 나왔다. 세속정부와 교회를 분리하라.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라.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분리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정교의 분리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두 나라 모두 인정하고 충성하라는 말씀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나라도 부정할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는 더더욱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두 나라는 모두 중요하다. 두 나라 사이에서 많은 기독교 신앙인들은 극단적 선택을 하고 싶겠지만, 예수님은 두 나라 모두에게 충성할 것을 선언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이 말씀은 ‘분리의 신학’이 아니라 ‘통합의 신학’이다. 이분법적 사고를 부추기는 주장이 아니라 금하는 주장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 A or B)’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 모두(both A and B)’를 품는 신앙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 모두 중요한 것이다. 이 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함께 겹쳐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