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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성 :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라 말하라”

갈릴리 예수산책-언어편 ②

 

자명성 :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라 말하라”

 

예수님의 언어철학의 핵심은 자명성이다. 예수님의 언어는 매우 자명했다. 분명하고 명료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 그 자체가 누가 들어도 분명하고 밝다. 난해할 것이 없다. 특히 어떤 입장을 밝힘에 있어서 분명하셨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언어의 자명성에 대해 강조하신 적이 있다. “오직 너희 말은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예’와 ‘아니오’ 사이에 ‘글쎄요’라는 중간지대란 없다. 예수님은 언어에서 중간지대가 있다는 것은 악한 의도에서 온 것임을 간파하셨다. ‘글쎄요’ 라는 중간 언어는 기회주의적 표현이다. 상황에 따라 ‘예’가 될 수 있고, ‘아니오’로 급변할 수 있다.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애매한 상황에 직면하면 중립적인 언어를 쓰길 좋아한다. 이쪽이나 저쪽을 선택해야 하는데 양쪽으로부터 원한을 살 것 같을 때 항상 중간지대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자신은 중립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은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자신은 이쪽 편도 아니고 저쪽 편도 아니라고 하면서, 나는 오직 하나님 편이라고 하면서 빠져나간다. 경계선이 없는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신앙이 있어 보이지만 현실 회피적 무책임이다. 심지어 자신은 양쪽 모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양쪽 모두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한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태도를 악이라 하신 것이다.

 

이 땅에서의 언어는 항상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선이든 악이든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많다. 선과 악을 모두 선택할 수 없다.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선이면서 악일 수는 없다. 믿으면서 믿지 않을 수는 없다. 하나님과 재물은 어차피 한 쪽만을 선택해야 한다. 둘 다 겸하여 섬길 수 없는 법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좁은 문이면서 동시에 넓은 문인 것은 세상에 없다. 예수를 스승으로 따르면 따르는 것이지 따르면서 따르지 않는 경우는 없다. 언어도단이다.

 

예술은 양자혼합으로 작품을 창조하지만, 신앙은 양자택일을 통해 창조된다. 선택이다. 어느 한쪽을 선택했다면 다른 쪽은 버리는 것이 신앙이다. 이러한 선택은 언어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이때 그 언어는 자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해야 한다. ‘예’라고 했으면 ‘예’에 맞는 행동을 취해야 하고, ‘아니오’ 라고 했으면 그에 맞는 행동을 하면 된다. 여기서 어정쩡한 태도는 용납될 수 없다. 우리 내면에 능구렁이를 키울 수는 없다. 예수님은 니고데모 같은 노학자 앞에서 거침없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자명하게 말씀하셨다. 연로한 어른의 위신을 생각해서 “들어갈지 못 들어갈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하지 않으셨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과 대화할 때도 그 여인의 본질적인 문제의 근원을 자명하게 말씀하셨다.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 “지금 너와 살고 있는 남편은 진짜 남편이 아니다.” 매우 분명하고 정곡을 찌르는 언어다. 그 여인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기 위해 말을 빙빙 돌리지도 않으신다. 매우 자명하다.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실 때 한 번도 우회적으로 표현하신 적이 없다. 아주 직설적이고 분명하다. 이러한 예수님의 언어습관은 정직함과 당당함에서 온다. 자명성은 정직하고 당당한 영혼만이 할 수 있는 결코 쉽지 않은 언어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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