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들도 가려느냐?” : 무리와 제자의 차이
“너희들도 가려느냐?” : 무리와 제자의 차이
복음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는 탁월한 제자관리의 능력을 보유하신 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비참하리만큼 인간관계에 실패하신 분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들을 크게 네 부류로 분류하셨다. 무리들, 70명의 제자들, 12명의 제자들, 그리고 세 명의 제자들이다. 예수님은 각 그룹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의 비밀 혹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드러내실 때 차이를 두셨다.
무리들에게는 치유 사역과 오병이어와 같은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는 정도로 대하셨다. 70명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능력을 전수하고 전도훈련을 시키는 수준에서 관리하셨다. 12명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능력을 포함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갖추어야 할 성품과 자세, 이른바 ‘제자도’를 익히게 하셨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은밀한 치유 현장에 데려가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눈물의 기도에 동참시켰고, 변화산 현장에 데려가셔서 하늘의 신비와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주셨다.
당시 예수님의 대중적 인기는 5천 명 이상의 대대적인 군중을 몰고 다니는 메가톤급 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유대의 왕이 되어줄 것을 요청받는 막강한 정치 지도자로서의 명망까지 얻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몇 마디에 그의 광팬(?)들은 썰물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70명의 제자라고 따라다니던 사람들도 60명 가까이 떠나가면서, 12명의 제자들만 남는다. 그러던 것이 십자가 사건을 정점으로 12명의 제자들마저 떠나고 배신하고, 심지어 팔아버리기까지 하는 비참한 과정을 겪으신다. 오늘날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인맥관리에 있어서 예수님은 그리 성공적인 분이 못되었다.
도대체 그 많던 무리들은 왜 예수님을 따라왔다가 순식간에 떠나갔을까? 이른바 “너희도 가려느냐?”는 예수님의 외롭고 민망한 질문은 자신 곁을 떠나가는 제자들을 두고 던지신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 무리들이 몰려들게 한 ‘형이하학적 요인’과 예수님을 떠나가게 한 ‘형이상학적 요인’을 극명한 대조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14절)”,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15절)”,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21절)”에서 보듯이, 예수님께 몰려들게 한 요인은 바로 오병이어 기적이나 치유의 사건을 통해서 얻은 일시적인 ‘썩을 양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사람이 이 떡을 먹어야 영생한다,”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29-65절)” 라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앞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격과 놀람 속에서 떠나간다. 점점 심오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어렵고 혐오스럽다며 떠나간다. 결정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겸하지 않고는 진정한 제자로 살 수 없다는 단호한 선언에 12명의 제자들도 흔들렸다. 드디어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 섰을 때는 모든 제자들이 도망가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여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관리에서 의외의 수확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성 그룹은 예수님의 사역에 경제적인 후원자가 되어 주었고, 예수님의 사역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며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예수님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부활하신 후에도 가장 먼저 만난 사람들도 여자들이었다. “너희도 가려느냐?”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우리는 누가 예수님을 떠날 무리이고, 누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참 제자인지 깊이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