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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와 이웃 2

【갈릴리 예수산책】 원수와 이웃 ❷

 

선한 사람 따로 없고 악한 사람 따로 없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6-48).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위대한 안목을 보게 된다. “사람은 다 똑같다. 사람을 선악구조로 판단하지 말라.” 이게 새로운 말씀이다. 원래 선한 사람 따로 있고, 원래 악한 사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선한 사람이 곧 악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이 곧 선한 사람이다. 한 인간의 선함 속에 악함이 공존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도 영원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못하다. 그러나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을 선악 구조로 생각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택한 선민이며 백성이자, 의인이며, 이방인들은 원래 버려진 존재이며 악하며 죄인이라고 판단한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판단 자체를 깨어 버리고 계신다. 세상에 선한 사람 따고 없고, 악한 사람 따로 없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신다는 사상이다. 만인평등주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선과 악으로 나눌 생각을 하지 말라. 이분법으로 나누기 때문에 항상 우리에게는 미워하고 제거해야 할 원수가 생긴다. 결국 예수님은 이러한 이분법적 선악구조를 깨면서 모세오경의 핵심가치까지 뒤집어 버리는 지점까지 끌고 가신다.

 

48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결론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구약의 모세오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핵심적인 신앙과 윤리는 단 하나, ‘거룩’이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2).” 애굽의 노예로 살다가 광야로 뛰쳐나온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리였고, 구별이었으며, 깨끗함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노예같은 이스라엘에게 이방 문화와 접촉하고 이방인과 결혼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기에 광야생활 40년 동안 모세가 강조하고 또 강조한 것이 거룩, 곧 분리요 구별이요 정결이었다. 

 

레위기에서 모세가 그토록 강조한 거룩의 실천윤리는 네 가지였다. “먹지 마”, “만지지 마”, “만나지 마”, “하지 마”이다. 오징어나 돼지고기 같은 거 먹지 마. 죽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전염병 환자 만지지 마. 이방인이나 무당이나 우상숭배자들을 만나지 마. 살인이나 동성애나 도둑질 같은 거 하지 마. 이것이 거룩이다. 분리하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미성숙한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새로운 차원의 말씀을 선언하신다. “먹어 봐.” 오징어도 먹어보고 돼지고기도 먹어보고 그리고 율법에 금한 것도 먹어 봐. “만져 봐.” 시체도 만져보고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봐. “만나 봐.” 이방인도 만나보고 죄인들도 만나서 밥도 먹어 봐. “해 봐.” 사람을 사랑해 봐. 예수님은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 드시면서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영성을 말씀하신다. 

이태리 최고의 지성 조반니 파피니는 자신이 쓴 책 <예수의 이야기>에서 이런 의미 있는 말을 했다.

 

부처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무(無)를 이야기했는데, 이 말은 불교의 사랑이란 이기적 사랑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모든 고통의 해탈을 얘기했는데 굉장히 이기적인 사랑이다. 플라톤도 기껏 한 말이 자신이 받은 불공정함 때문에 불공정하게 사람을 대하지 말고, 악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악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정도만 이야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모욕을 당하고 분개하지 않는 것은 비겁하고 노예 같은 인간이라고 얘기했으니, 지극히 정의만을 이야기 한 것이다. 세네카는 현자란 복수하지 않고 모욕을 잊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복수하지 말고 그냥 잊으면 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고대 사회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몰랐다. 적어도 산상수훈이 있기 전까지는 사랑에 대해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사랑에 대해서 도전을 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예수의 위대함과 새로움은 바로 그 사랑에 있다. 그 사랑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 사랑은 절대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 사랑은 쉽게 흉내 낼 수도 없고 온전히 따라 하기도 벅차다. 그래서 그 사랑은 영원한 진리일 것이다.

 

48절의 말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란 바로 사랑이며, 그 사랑은 더 이상 구별하지 않고 분리하지 않으며 차별하지 않는 마음이자 행위이다. 나누지 않고 모든 것을 같이 하나로 본다는 뜻이다. 사람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고, 세상을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으로 나누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끌어안을 수 있는 마음, 그것이 아버지의 온전함이며,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랑이다.

 

또 다시 산상수훈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선과 악을 나누기를 좋아하고, 싫은 사람을 분리하는 것이 편하며, 못난 사람을 차별해야 내가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모세의 거룩함의 영성을 넘어 예수님의 온전함의 영성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또 다시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 앞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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