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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먼저 염려하라

【갈릴리 예수산책】 산상수훈 편

 

하나님 나라를 먼저 염려하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3-34)

 

자연을 바라보는 것은 염려를 떨치는 소극적 방법이다. 예수님은 33절에서 정말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신다. 산상수훈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염려하는 인간에게 자연을 생각하며 염려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은 결코 좋은 권면이 못 된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말라’는 들리지 않고 ‘염려’만 들린다. 이것을 버클리대학교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frame)’이라 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코끼리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언어의 틀에 갇혀서 사고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 더 걱정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두 번째로 내놓으신 대안이 염려를 하라는 것이다. 다만 그 대상을 바꾸라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염려하라는 것. 하나님 나라를 염려하다 보면 세상 염려는 사라진다. 좀 더 근사하게 표현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추구(seek)하라고 하신다. 추구란 집중하여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면, 세상 모든 염려는 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내가 서로 염려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을 염려하고 하나님은 나를 염려하신다. 문제는 우선순위다. 하나님 나라에 둘 것인가 세상 나라에 둘 것인가. 나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고, 하나님은 나의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살 것을 염려하고 공급해주신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에 둘 것인가, 내가 먹고 자고 쓰는 것에 둘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은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면 너가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심리학의 천재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다. “내가 주일을 지킨다.” “내가 예배를 지킨다.” 천만의 말씀이고 틀린 말이다. “주일이 우리를 지켜준다.” “예배가 나를 지켜준다.”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써 예배가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한다. “내가 헌금을 드린다?” 그렇지 않다. 그 예물이 우리를 지켜준다. “내가 봉사하고 섬긴다?” 아니다. 봉사함으로써 그 봉사 자체가 우리를 지켜준다. “내가 하나님을 섬긴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염려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염려해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그 말씀이다. 

 

얼마나 좋은 말씀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고 마지막 더 설명을 하신 것이 34절의 말씀이다. 34절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제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아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말은 “내일 일은 내일 가서 염려해라”가 결코 아니다. 염려를 내일로 미루라는 것이 아니다. 염려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내일’이라는 것이다. 내일이 염려한다는 뜻이다. 내일이 주어다. 내일이라고 하는 시간이 염려한다.

 

시간이란 그러면 누구의 것인가? 하나님의 것이다. 모세오경에서 이자를 받지 말 것을 명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자란 시간에 돈의 가치를 매기는 행위다. 마치 시간이 인간의 것인 것처럼 착각해서 만든 게 이자놀음이다. 그러나 성경은 시간이란 철저히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시간에 돈을 매겨서 이자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따라서 내일은 내일이 염려한다는 것은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친히 염려하시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염려와 관련하여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무엇일까? 딱 두 마디이다. 하나님께 할 수 있는 한 마디와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한 마디가 있다.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몰라요”이다. “하나님 나는 몰라요.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한 치 앞도 못보는데 어떻게 내일 일을 볼까요. 내 마음이 어디로 흐르는지 나도 모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뜻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이고, 그리고 지극히 겸손한 표현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 대한 전적 의지를 표현한 말 중에 가장 좋은 말일 것이다.  

  

나를 향하여 꼭 해야 할 말은 “괜찮아” 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욕하고 비난하고 모함해도 나는 나를 욕하면 안 된다. 나를 비난하면 안 된다. 나는 나를 위로하고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 나 외에 나를 이해할 존재가 또 있는가? 내가 왜 이런 지경에 있는지 누가 가장 잘 이해해 줄까? 나 밖에 없다. 괜찮아. 염려하는 인간이 꼭 해야만 하는 것이 자기 용납이다. 자신을 용납하는 자만이 세상을 용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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