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려는 순리를 따르지 않아서 오는 병이다
【갈릴리 예수산책】 산상수훈 편
염려는 순리를 따르지 않아서 오는 병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5-27)
어느날 교인 한 분이 목사를 찾아와 하소연한다. “목사님, 저는 아이들, 남편, 직장, 세상만사를 놓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염려합니다. 정말이지 걱정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그런 세상 어디 없나요?” 목사님이 바로 대답한다. “아, 예. 있지요. 공동묘지가 바로 그곳입니다.” 어이없는 대화 같지만 여기에 중요한 진실이 있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염려와 걱정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어느 시인이 쓴 <염려>라는 시 중에 나오는 몇 구절을 소개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동물 중에 위장에 구멍이 나도록 염려하는 동물은 사람밖에 없다. 인간은 배우지도, 노력하지 않아도 날마다 염려하는 일에 익숙해 있다. 그러다 문득 염려 없는 날이 오면 염려하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며 또 염려한다. 실제로 염려거리가 있어서 염려이고, 염려거리가 없으면 없어서 또 걱정이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일이 염려이다. 그리고 하루를 접기 전까지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염려이다. 세상에 염려함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다. 두통이다. 두통 외에 별로 얻을 것이 없음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학습된 염려로 아침을 연다. 그리고 지독한 염려로 하루를 닫는다.
<모르고 사는 즐거움>의 저자 어니 J. 젤린스키는 우리가 실제로 염려하는 것의 40퍼센트는 절대로 현실에 일어나지 않으며, 30퍼센트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이며, 4퍼센트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며, 내가 바꿀 수 있는 일은 4퍼센트라고 밝힌 적이 있다. 우리가 정말 키를 한 자라도 늘일 수 있는 현실 가능한 염려는 4퍼센트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당시 다양한 염려증에 걸려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먼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막연하게 미래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다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막연한 염려이다. 사실 염려는 우리의 삶의 일부이다. 별 것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서양속담에 “고양이도 근심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듯이, 염려는 강박을 낳고, 강박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절망을 낳으며, 절망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재물 두 가지를 모두 섬기고 싶어한다. 그리고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어느 한 쪽을 섬기는 순간 다른 쪽은 버려지게 되어 있다.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둘 다 섬기고 싶고, 어느 쪽 하나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래서 생기는 정신적 증세가 25절부터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염려’라는 병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고 싶어하는 인간들에게 생기는 심리현상이 바로 ‘염려증’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동물 중에 위장에 구멍이 날 정도로 염려하는 동물은 사람밖에 없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26~31절에서 염려하는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신다. 그리고 염려에서 벗어나는 인간을 동시에 제시하신다. 무엇보다 먼저 자연을 생각하라. 자연을 생각하면 염려라는 것이 덧없음을 깨닫는다. 왜 염려하는가? 순리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이란 순리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두 가지 예를 드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공중의 새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자기 마음 가는대로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
하나님은 자연을 섭리하시는 근원자시다. 예수님은 여기에다 가치를 따지신다. 공중의 새가 귀하냐, 너희가 귀하냐? 너희가 귀하지 않느냐? 사람이 귀하지 않느냐? 두 번째 들의 백합화를 보라. 수고를 하느냐, 길쌈을 하느냐?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의 섭리 속에서 알아서 잘 자란다. 여기에 또 가치를 묻는다. 솔로몬이 7년 동안 엄청난 레바논 백향목을 들여서 지은 성전이 더 아름다우냐? 들의 백합화가 더 아름다우냐? 잠실에 있는 어마어마한 120층의 롯데 타워가 아름다운가? 저기 북악산 자락에 핀 꽃이 아름다운가?
하나님의 순리를 따르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에서 온다. 세상에 가장 고귀한 가치는 순리에 따르는 가치다. 순리대로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고귀한 가치라는 거다. 아무리 인공적으로 엄청난 돈과 권력으로 세상에 아름다운 빌딩을 짓는다 한들, 그것은 지나가 사라질 들꽃만도 못한 것이거늘, 어찌하여 사람들은 그런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것에 몰두하고 집중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가?
자연의 순리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보면, 염려라고 하는 것이 덧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차피 염려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염려해서 내가 무엇을 끌어내리고 끌어올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그것은 자연의 흐름대로 흘러갈 것인데 굳이 내가 무엇인가 바꿔보려 하다가 역류에 휩쓸릴 것 아니겠는가. 물과 같이 살아라. 막히면 돌아가고, 떨어지면 떨어지고, 올라가면 올라가라. 그것이 순리이다. 순리에는 염려가 설 자리가 없다. 기가 막힌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