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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증 : 우리는 구원받은 것을 어떻게 아는가 (2)

【갈릴리 예수산책】 기독교 구원론 – 11

 

구원의 확증 : 우리는 구원받은 것을 어떻게 아는가 (2)

 

(지난 주에 이어서)

 

웬만큼 신학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물음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과정, 구원의 신비를 바람으로 설명하셨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람과 같다고 하셨다. 바람이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나뭇잎이 날아가는 것을 보면 바람임을 확신한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머릿결이 바뀌어 있고 볼은 붉어지고 나뭇잎은 떨어져 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알 수 없듯이 성령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과정을 알 길이 없다. 바람이 보이지 않듯이 내가 언제 어디서 거듭났는지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바람과 같은 성령이 지나간 자리에 내가 변했다는 것은 안다. 머릿결이 바뀌었고 볼이 붉어졌듯이, 내가 영적으로 변한 사실은 알 수 있다. 예전에 하지 않던 기도를 하고, 예전에 꿈도 꾸지 못했던 예배를 드리며, 텔레비전을 보아야 할 시간에 성경을 보고, 구두쇠 같은 내가 헌금을 다 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고, 가요밖에 모르던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을 한다. 심지어 내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말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령이 지나가지 않고는 우리 입에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도리가 없다. 적어도 우리는 예수를 이웃집 아저씨로 고백하지는 않는다.

 

이 변화는 어떻게 된 것인가? 바람이 불고 지나간 것이다. 성령이 임한 흔적이다. 구원의 확신은 어떻게 아는가? 과정은 모른다. 결과로 안다. 성령이 지나간 자리가 변해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결과일 뿐이다. 내가 지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현상 자체로 아는 것이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예수를 만나서 고침을 받고 눈을 뜨고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묻는다. 어떻게 눈을 떴는냐고. 그는 대답한다. ”어떻게 떴는지는 나도 모른다. 예수라는 분이 오셔서 흙에 침을 이겨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한 게 전부다. 눈을 뜨게 한 방법과 원인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이 하나 있다. 어제까지는 눈을 감은 시각장애인이었으나 지금은 눈을 떴다는 것이다. 지금 눈을 떠서 당신을 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어제는 소경이었으나 지금은 정상이다. 그것은 확실하지 않느냐.“ 구원받은 과정은 알 수 없으나, 구원받은 결과는 분명히 안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구원파가 묻는 질문에 당황할 필요가 없다. 언제 구원받았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말하라. 그러나 구원받았다고 말하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따지면, 내가 지금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사모하고, 예배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원하고, 죄를 지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지금 내 상태가 구원받은 상태라고 말하라.

구원의 확신과 관련하여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①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 ②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③ 구원을 받지 못했는데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④ 구원을 받지 못했는데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사람들 중에 ①번과 ④번은 차라리 정직한 사람들이다. 문제는 ②번과 ③번이다. 특히 수많은 그리스도인 중에 가장 비참한 사람이 ②번이다. 자신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면서도 머릿속 인식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생활과 의식이 따로 가는 사람이다. 기독교의 구원이란 삶과 인식이 일치해야 한다.

 

쉬운 예로, 10년을 감옥에서 살던 아들을 아버지의 노력으로 석방시켜서 이제는 아버지의 집에 산다고 치자. 그런데 아들은 감옥살이의 고통이 너무 심했는지 항상 아버지 집을 감옥이라고 생각한다. 이 아들은 진정으로 석방되었는가? 감옥에서는 수감자의 인식이 필요하고, 아버지 집에서는 자녀의 인식이 당연하다. 그러나 아버지 집에서 수감자의 인식을 한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면서 머릿속에는 죄인의 정체성을 갖고 산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을 버리운 자라 표현한다. 구원이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실제와 구원받았다는 의식이 같은 것을 말한다. 구원의 의식과 생활이 동일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이미 천국의 삶을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쉬운 말로,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갈지 못 갈지는 죽어봐야 안다는 말은 기독교 구원과 상관없는 유교적 사고이다.  

 

바울은 구원의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에베소서 6장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 곧 전투하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에서 갑옷의 구조를 신앙의 주요 요소들과 대비하여 설명해 주었다. 진리의 허리띠, 정의의 호심경,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했다. 여기에서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최종적인 무기는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이다. 팔은 잘려도 발은 부러져도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머리에 화살을 맞으면 즉사이다. 생명의 최종 보루이다. 신앙의 생명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구원의 확신이 무너지면 믿음도, 말씀도, 진리도, 복음도, 기도도 소용없다. 죽은 존재이다. 그만큼 내가 구원받았는가를 확신하는 자기의식이 기독교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해 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교만도 아니고 우월의식도 아니며, 자부심은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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