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밀구제론 2
【갈릴리 예수산책】 은밀구제론 ❷
왜 구제라는 말에는 정의라는 뜻이 함께 있을까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제라는 말인 체데카를 구약의 정의에서 따왔다고 했다. 남을 돕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라는 의미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할 의무가 구제라는 뜻이다.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고 연민이 들고 동정심이 드는 것은 구제가 아니다. 그것은 ‘르하임’이라고 해서 긍휼이라고 한다. 자선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이 말하는 구제는 자선이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비참해서 돈을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도 불쌍하지 않다. 도와주지만 자랑하거나 티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교만해지지도 않는다. 남을 돕다가 자신이 교만해지고 상대적 우월감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받은 사람들이 기분 나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8가지 구제의 기술을 개발하기까지 했다. 생활의 성서라고 할 수 있는 탈무드를 보면, 구제의 여덟 가지 단계가 나온다. 제일 저급한 1단계는 무뚝뚝하게 돈을 주는 것이다. 무심하게 억지로 던져주는 것이다. 2단계는 기쁜 마음으로 직접 주는 것이다. 3단계는 상대방으로부터 요청을 받았을 때 직접 주는 것이다. 4단계는 상대방이 아쉬운 소리 하기 전에 눈치껏 미리 주는 것이다. 5단계는 도움을 받는 자는 누가 주는지 알지만, 도움을 주는 자는 누가 받는지 모른다. 6단계는 도움을 주는 자는 누구에게 주는지 알아도, 도움을 받는 사람은 누가 주었는지 모른다. 7단계는 주는 사람도 모르고 받는 사람도 모른다.
마지막 최고 수준의 8단계 구제는 빌려주는 것이다. 빌려줘서 사업을 하게 하거나 동업을 하거나 직업을 구해서 스스로 독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여덟 가지 구제의 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돕는 것이다. 서로가 당당하고 즐겁게 주고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구제요 정의다.
예수님은 바로 구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셨기에 은밀하게 해야 한다고 강변하신다. 은밀하게 해야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고, 자랑하여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사람에게 상을 받기보다 하늘의 상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구제는 윤리이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신앙적 행위다. 하나님을 향한 봉헌이요 하늘의 창고에 보물을 쌓는 영적 행위다.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 기독교처럼 남을 그렇게 많이 도와주는 종교가 없다. 얼핏 보기에 사람들은 개신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는 걸 보면 무척 인색해서 그런지 아는데, 통계를 보면 개신교의 구제율이 다른 종교에 비해 월등히 높다. 사회복지기관 숫자만 해도 개신교가 전체에서 54퍼센트나 차지한다. 가톨릭은 17퍼센트로, 두 배 이상 많다. 수재의연금을 내도 개신교가 압도적으로 많다. 대북 지원 또한 전체 기부금의 절반을 개신교가 낸다. 대한민국에서 개신교는 돈 내고 욕먹는 종교가 되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타 종교에 비해 기가 막히게 잘한다. 교회처럼 나서서 잘하는 데가 없다. 그런데 왜 욕을 먹는가 하면 구제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통을 하지 못하고 반사회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들이 알려지면서 신뢰도가 떨어져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제에 관하여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 한 가지 토를 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구제를 바리새인 정도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지나친 구제행위에 따른 교만과 외식을 비판하신 것이지 구제 자체를 비판하신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실까? “나팔을 불어도 좋으니까 바리새인 정도라도 구제를 해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아도 좋으니까 구제 좀 해라.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하든 마땅한 생각이 들어서 하든 일단 어려운 사람을 도와 줘라!” 소자에게 물 한 모금 주는 것, 대접할 수 없는 이에게 대접하는 것, 이게 구제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