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와 부활 :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
【갈릴리 예수산책】 기독교 구원론 – 7
십자가와 부활 :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
지난 주에 요약한 예수님의 네 가지 이름은 당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 따라다니던 제자들의 눈에 비친 모습이었다. 기도하는 신비주의자, 병고치는 치유자, 잘 가르치는 랍비,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직설적으로 던지는 사회적 예언자는 당시 예수님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면면들이다. 여기까지가 역사의 예수가 보여준 모습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말하는 두 가지 모습은 신앙의 그리스도로 제자들이 후에 성령을 받고 해석한 모습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의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의 인생의 끝은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33년 인생 중 1주일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 중에 일어난 죽음의 사건이다. 그 사건이 그의 33년 인생 모두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상징이 되어 버렸다. 예수의 사상은 워낙 과감하고 급진적이어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는 비난을 끝까지 받았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이 자신 안에,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강조하고 다니셨고, 이에 종교지도자들은 신성모독죄를 씌워 재판에 넘긴다. 물론 산헤드린 공의회와 같은 종교의결기관이 신성모독죄인을 죽일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종교적인 사안에 비교적 관대했던 로마제국의 속성을 잘 알았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정치적 사안으로 바꾸어 빌라도의 재판정에 세운다. 로마제국이 가장 싫어하고 예민해 하는 것, 반역의 혐의를 씌운 것이다.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전쟁을 일으켜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하여 자신이 유대의 왕이 되고자 하는 열혈무장투쟁 지도자의 모습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 죄패의 이름은 ”유대인의 왕“이었고, 철저히 정치적 죽음으로 위장된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후 성령을 받고 나서 예수의 죽음을 새롭게 해석한다. 예수의 죽음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대속의 사건“이었다. 나아가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구원의 사건“이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양을 잡아서 바치면서 자신의 모든 죄를 양에게 뒤집어씌우는 동물을 통한 속죄를 해야 했듯이, 이제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어린 양이다.
예수의 죽음으로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악의 막힌 담이 헐렸으며, 하나님께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아담과 함께 죄인이 되었던 우리가 이제 예수의 죽음을 힘입어 의롭다 인정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호를 다시금 얻게 되었다. 거듭났으며 구원받았으며,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은 존재가 되었다. 새사람이 되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하나님이 입양하신 양자가 되었다.
예수는 부활의 주이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고 영원히 무덤에 묻히지 아니하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셨고, 500여 제자들에게까지 나타내셨으며, 심지어 예수를 핍박했던 바울에게까지 부활의 모습으로 보이셨다.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으로 끝났다면 기독교는 훌륭한 사상을 전파하다 억울하게 죽은 한 성인을 추모하는 종파로 남았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처럼 말이다.
예수는 부활하심으로 기독교는 추모와 애통의 종교가 아니라 희망과 생명의 종교, 증언과 선포의 종교로 급변한다. 이제 제자들에게 예수의 삶은 오직 두 가지로 요약된다. 십자가와 부활 혹은 고난과 영광 혹은 죽음과 생명이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으며, 고난 없이 영광이 없으며, 죽음 없는 생명은 없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축이며, 예수의 전부이며, 복음의 핵심이다.
결국 복음서라고 하는 것은 예수라는 분에 대한 일대기이고 전기이며 요약이다. 그 속에서 예수는 기도하는 신비주의자, 말씀을 가르치는 지혜의 스승, 하나님의 뜻을 과감히 외치는 선지자, 사람들의 영혼육을 고치는 치유자의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신 예수의 모습을 모두 목격한 제자들에게 예수는 오직 두 가지 모습 밖에 남지 않았다. 바로 고난의 주와 부활의 주, 그것이다.
복음서라고 하는 것은 예수의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십자가와 부활 때문에 쓰여진 책이다. 마태복음이 40퍼센트, 마가복음이 60퍼센트, 누가복음이 33퍼센트, 요한복음이 50퍼센트나 되는 분량을 왜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에 할애했겠는가? 우리가 역사적인 인물을 기억할 때는 항상 그 인물의 인생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하나씩 있게 마련이다. 이순신 장군 하면 누가 뭐래도 임진왜란이다. 세종대왕은 수많은 일을 했지만 단연 한글창제이다. 스티브 잡스 하면 곧바로 애플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하면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렇게 많이 공부한 바울은 예수를 믿고 나서 지식관이 이렇게 바뀌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바울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 이제 그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이며, 그 구원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에서 비롯함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의 죽음과 부활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5)“,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으며(엡 2:13)”, “둘로 하나를 만드사 막힌 담을 허셨으며(엡 2:14)”,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로마서 5:8)” 하셨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결정적 확증의 사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