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의 보편성 :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인이다
【갈릴리 예수산책】 기독교 구원론 - 4
죄의 보편성 :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인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두 사람은 자식을 낳으며 인류의 계보를 이어간다. 첫 자식이 가인이요 둘째 자식이 아벨인데, 첫째가 둘째를 죽인다. 형제살해라는 인간 죄악의 극치를 바로 보여준다. 이후 인간의 족보는 죄악의 족보요, 살인의 역사며, 저주의 수레바퀴로 돌아간다. 인간은 도저히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아담과 하와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왜곡했으며, 심지어 반역하여 돌아서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살인의 범위는 광범위해지고 잔인해졌으며 전쟁은 인류역사 자체가 되었다. 죄는 죄를 낳았고, 인간은 스스로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이런 인간을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이라 했다. 진노의 자녀라고도 한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여주었지만 외면하는 인간이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감사할 줄도 모른다. 아예 마음에 하나님이라는 단어 자체를 두기를 싫어한다. 그 결과 생각이 허망해진다. 마음은 어두워진다. 창조자를 망각한다. 그러다 보니 피조물을 창조자인 줄 알고 경배한다. 피조물을 숭배한다는 것은 자기 욕망으로 살아감을 의미한다. 결국 욕망대로 사는 인간은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며 사는 존재가 된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을 네 가지 상태에 있는 존재라고 진단한다.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 세상 풍조를 따르는 존재,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존재, 그리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 즉 욕심을 따라 사는 존재이다.
바울은 또한 타락한 인간을 “모세 안에 있는 인간”이라고도 말한다. 율법으로 사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바리새파 출신의 대단한 율법주의자였으며, 한때 율법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 율법이란 것이 얼마나 초보적인 세계였는지 깨달은 사람이기도 하다. 바울에 따르면, 율법은 지극히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다. 율법은 행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그러므로 아무리 할례를 받아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해도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면 무할례자이며, 할례를 안받았어도 율법을 행하기만 하면 할례자라고까지 말한다. 그만큼 율법은 행함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 바울은 아무도 율법을 완벽하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외친다.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이란 죄를 깨닫게 해주는 일을 할 뿐, 행하게 해 주는 힘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든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있을까? 없다. 오직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이를 의로 여겼다고 창세기는 증언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바울은 나아가 율법이 없다면 그곳에는 죄를 짓는 것도 없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율법이란 것 자체는 진노를 낳을 뿐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고 보았다. 율법이 없었으면 나는 죄란 것도 몰랐을 것이다. 바울은 예를 든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않았으면 내가 탐심이란 죄를 알았을까? 죄가 기회를 타서 율법을 통해서 내 속의 온갖 탐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죄를 더욱 죄되게 하는 역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 지경에 이르자 바울은 로마서 7장 19-24절에서 자신의 고뇌를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속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 그런데 악이 더 강하다. 악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나를 이끌고 간다. 이런 나를 이끌고 다니는 실체를 나중에야 깨달았다. 내가 아니고 내 속에 죄란 놈이다. 그것이 나였다면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다. 그러나 그것이 죄라는 다른 실체이기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곤고하고 답답할 뿐이다. 여기서 율법은 나에게 아무것도 해주는 게 없다.
바울의 말을 정리해 보자. 율법이란 행위의 법이다. 행하면 교만해지고, 행하지 못하면 죄책감에 시달린다. 율법은 하나님 중심의 법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법이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할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 역할 정도는 한다.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죄를 깨닫게 해주고, 결국 인간의 도덕적 능력의 한계 앞에 서게 해준다는 면에서 그렇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죄의 권능 앞에서 비참하게 지배당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