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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메시지 2 :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다

【갈릴리 예수산책】 기독교 구원론 편 - 3

 

구원 메시지 2 :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다

 

창세기는 인간의 첫 모형으로 아담과 하와라는 두 인물을 등장시킨다. 흙이라는 뜻을 가진 아담은 그 이름 속에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이라는 곳에서 인생을 시작한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최초의 사회이자 환경이다. 완벽한 곳이다. 이곳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창 2:9). 동산의 각종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창2:16).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정의와 법이 있다(창2:17). 에덴동산에서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랑을 나눈다(창 2:25). 하나님께서 최초로 인간에게 주신 에덴동산은 생명과 자유와 정의와 사랑으로 움직이는 사회였다. 에덴을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 뱀이 등장한다. 뱀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가장 간교한 짐승이다. 기독교에서는 뱀을 사탄의 상징으로 여긴다. 그는 혼자 있는 하와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토를 달며 도전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하나님의 정의를 문제 삼는 질문이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대답한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3).”

 

여기서부터 인간의 거짓 언어가 등장한다. 과장과 왜곡이다. 먹지 말라고만 했지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없었다. 반드시 죽는다고 했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부정확한 지식과 거짓말은 뱀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어 헷갈려하는 하와의 영혼에 뱀은 반대 명제를 단호하게 집어넣는다. “결코 죽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새롭게 해석해 준다. “하나님과 같아져서 자신의 자리가 위협당할까 봐 먹지 말라고 한 것야.” 뱀은 하나님이 인간을 시기하고 견제하고 억압하는 분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이 밝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뱀은 하와에게 속삭인다. 그러나 하와는 바로 그것이 유혹이었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다. 새로운 세계를 보고 싶은 안목의 정욕과 흙덩어리 존재가 영덩어리 존재가 되고자 하는 신적 욕망을 자극한다.

 

욕망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눈이 밝아지고 싶어하는 욕망과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면서 하와는 벌써 눈빛이 바뀌고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뱀의 말은 하와의 시각을 바꾸어 주었고, 금단의 열매가 갑자기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뒤바뀐 안목은 마음을 움직이고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하와의 손은 과감하게 열매로 향했고 그 손에 들어온 열매는 하와의 입으로 들어가 유혹의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죄는 혼자만 지을 수 없는 법. 공범을 만들어야 한다. 하와는 곧바로 아담에게 열매를 먹인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면서 떠나는 최초의 행위다. 이를 성서는 죄(sin)라 이름 짓는다.

 

하나님의 정의가 깨어지는 순간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처럼 눈이 밝아진다. 뱀은 두 가지를 약속했다. 눈이 밝아질 것과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맞았고 하나는 틀렸다. 뱀의 언어는 항상 양날의 검처럼 인간에게 다가온다. 눈은 밝아졌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지도 않는다. 밝아진 눈으로 인간이 처음 본 것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현실이다. 사랑과 정의의 가죽으로 덮어져 있어 부끄러운 줄 몰랐던 알몸이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사랑과 정의의 눈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인간에게 남는 것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피하게 하고 숨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피하여 숨는 인간을 끝까지 찾아 나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만든 주인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어놓고 내버려 두는 비인격적인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손수 자신의 생각과 꿈을 가지고 인간을 빚으셨기에 인간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을 떨치지 못하신다. 인간의 삶에 깊이 참여하셔서 관계하신다. 인간은 그런 하나님이 무섭고 싫어서 도피하여 숨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끝까지 간섭하신다. 성서가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하나님은 열매를 먹고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를 부르신다. 그리고 왜 나를 피하는지, 왜 먹었는지를 따져 물으신다.

 

아담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어겼기에 하나님이 두려워졌고, 그래서 도망쳤다고 대답한다. 왜 먹었는지에 대해서는 하와에게 핑계를 돌린다. 자기는 주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담은 이 사태의 원인을 하나님께 살짝 돌린다. 이 여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은 다시 하와에게 묻는다. 하와는 그 이유를 뱀에게 돌린다. 죄를 지은 인간은 일단 숨기고 본다. 그러다 드러나면 부정한다. 그러다 부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합리화한다. 그것도 안 될 때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은폐와 부정과 합리화와 희생양 찾기는 인간이 오랜 역사를 통해 터득한 죄에 대한 방어기제다.

 

이로써 인간의 원형인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었다. 신학에서 이것을 원죄(original sin)라 말한다. 원죄란 최초의 인간이 지은 처음 죄를 뜻하기도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을 수 있는 인류보편적 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원죄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인간이 그 관계를 깨뜨려버림으로 하나님을 떠난 행위를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존재요, 하나님이 긍정하신 존재이자, 하나님이 복 주신 존재인 아름다운 인간은 이제 하나님과 관계없는 존재가 되었다. 성경은 이것을 죄인이라 말하고, 타락이라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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