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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버지로 관계하라

【갈릴리 예수산책】 산상수훈편 - 자유기도론 3

 

하나님을 아버지로 관계하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예수님은 마음껏 기도하라고 하신 후, 9절부터는 새로운 기도의 차원을 열어 보이신다. 간절히 구하고, 즐겁게 찾고, 열심히 두드리는 것도 좋지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한 발 더 들어가는 것이 있음을 알려주신다. 그것은 기도의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아버지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혁명적인 발상이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 그것은 신성모독처럼 여겨졌다. 만군의 하나님, 만왕의 하나님은 불러보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멀리 두지 말고 나를 낳으시고 기르시고 보살피고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대할 것을 선언하신다.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에서 제시하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다. 아들의 무례함을 다 받아주시고, 떠나는 아들을 붇잡지도 못하고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매일같이 기다리고, 돌아온 자식을 그저 기뻐하고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는 그런 아버지다. 복음서에서 아버지 신학은 예수님의 가장 파격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요아킴 예레미야스는 재미있는 연구를 했다. 그는 조교들과 함께 예수님의 기도를 비롯하여 유대의 모든 기도문들을 조사했다. 그 결과 고대의 유대 기도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기도문이 예수님의 기도문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도의 호칭이었는데, 바로 “아바 아버지”라는 것이었다. 세상의 어떤 기도문에도 자기의 신에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호칭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기도문 밖에 없었다.

 

그의 ‘아빠 신학’은 신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 너무 지나친 해석이라는 지적을 받기는 했지만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친밀하게 부른 것은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그 이름, 아버지를 예수님은 하나님께 사용했다. 무슨 뜻인가?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은 지극히 인격적이고 자비로운 아버지라는 것, 내가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계시는 아버지, 알아서 응답하시고 도와주시는 아버지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기도의 세계에서는 혁명적인 발상이다. 일반적으로 기도 하면 지성감천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극한 정성과 눈물과 간절함이 기도의 원동력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반대다. 간절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다. 하나님이 바알과 아세라 같은 신이라면 지성감천만이 기도의 비결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간절함이 아니다. 사랑이고 믿음이며 기뻐하는 것이다. 그저 아버지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자녀는 아버지에게 깍듯한 예의를 갖추어 며칠씩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가며 등록금을 달라고 탄원하지 않는다. 한 마디면 충분하다. 문제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의식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이것처럼 위대한 가르침이 어디 있을까?

 

그러므로 아무리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기도하는 대상이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기도는 다 끝난 것이다. 아버지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기도하는 사람과 모르고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의 깊이 자체가 벌써 다르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은 하루 종일 기도했고, 엘리야는 5분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불은 엘리야에게 떨어졌다. 왜 그런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6).” 바알 선지자들은 바알과 인격적 관계의식이 없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과 자신이 주인과 종이라는 관계의식이 매우 분명했으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 또렷한 목적의식이 있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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