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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눈에는 누구나 들보가 하나씩 들어있다

【갈릴리 예수산책】 산상수훈편 – 비판론 2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 7:3-4)

 

인간의 눈에는 누구나 들보가 하나씩 들어있다

 

우리가 남을 심판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3절과 4절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무슨 의미인가? 너의 눈 속에 들보가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내 눈에 들보가 있는데도 남의 티는 보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왜곡의 가능성이다. 모든 인간은 타인을 판단하거나 심판할 때 항상 오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들보란 고약스런 편견이자 낡은 고정관념이며, 자기주관적 세계관이자 자신만의 아집 덩어리다. 나름대로 살아오면서 자기가 쌓아온 자기만의 경험과 시각과 관점으로 타인을 보려 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오늘날 객관성과 합리성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과학조차도 객관적 진리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인간이 보는 모든 시각에는 들보가 하나씩 들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현대철학 가운데 현상학이 있다. 독일의 후설이라는 철학자가 만든 사상체계다. 나는 대학원 시절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겠다 싶어 철학과에 가서 현상학이라는 수업을 듣게 되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막상 수업을 들어보니 그런 철학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너무 어려웠다. 교수님의 설명도 어렵고 책의 내용도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개념 하나 하나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떻게 흘렀는지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 뭘 공부했나 생각해 보니 딱 두 단어만 생각이 났다. 하나가 ‘지향성’이라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판단중지’라는 개념이었다.

 

후설의 주장은 대략 이러했다. 어떠한 현상 자체를 판단할 때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지향성, 영어로 ‘intention’이라는 것이 있다. 지향성이라고 하니 더 어려운 것 같은데, 쉽게 말하면 ‘의도’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볼 때 의도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설이 이어서 강조한 것이 ‘에포케’ 즉 판단중지라는 개념이다. 사람의 눈이란 어차피 의도와 왜곡의 들보가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을 판단할 때 일단 괄호치기, 즉 판단을 중지하거나 보류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은 그것입니다”라고 판단하는 순간 그것이 아닐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후설이라는 이 철학자는 굉장히 엄밀한 사람이다. 철학을 하기 전에 먼저 수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평생을 현상학에 몸을 바친 사람인데, 정말로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 판단하고 또 판단해 봐도 인간에게는 항상 ‘인텐션’, 즉 자기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에 항상 왜곡되어 있고 잘못 판단할 수 있으니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항상 과장할 가능성이 있다. 항상 확대할 수 있다. 항상 왜곡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나 많다. 이것이 바로 들보다. 이 들보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람은 어떻다”라고 판단하는 순간, 그것은 틀렸다고 보아야 한다. 거의 틀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성경은 심지어 “증인이 아니면 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목격자가 아니면 말할 수 없다. 내가 직접 보고, 직접 눈앞에서 본 것이 아니면, 그것 외에는 (괄호치기)를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괄호를 풀어서 판단을 해야할 때가 온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주어야 한다.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타인의 눈의 티를 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내 눈 속의 들보 이야기 때문에 이 말씀을 “너나 잘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타인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또 타인에게 실수가 있고, 죄악이 있으면 그것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 사실 오랜 교회의 전통이다. 교회 안에서는 잘못한 형제와 자매가 있으면 세 번 권면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서에 있다. 여기서 나온 게 삼심제다. 

 

타인의 티를 빼줘야 하는 일이 대두한다. 타인을 바로잡아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내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뺀다. 그리고 나서 남의 티를 뽑을 때는 검열관처럼 하지 말라. 악의적으로 타인의 실수를 원수 갚는 마음으로 하지 말고, 마치 의술을 베푸는 의사의 마음으로 하라. 의사가 칼을 들고 환자에게 칼을 대는 마음으로 하라. 그 모습 자체는 비판하는 모습이다. 심판하는 모습이고, 죽이는 모습 같다. 그러나 그 의사의 마음은 이 사람을 고쳐주고 싶은 거다. 그리고 이 사람을 사랑한다.

 

어거스틴을 회개시켰던 교부 크리소스톰은 사랑의 동기가 아니면 칼을 대지 말라고 권했다. 사랑의 동기가 아니면 그 사람에게 비판의 메스를 대지 마라. 그래서 항상 타인의 티를 빼려 할 때는 나의 들보를 뺄 때의 아픔으로 그 사람의 티를 빼라. 그래서 다른 사람이 실수할 때는 항상 저 실수가 나의 실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잘못들을 보면 다 남의 일 같지 않다고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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